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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50실링 - Mzee Jomo Kenyatta

은하철도의 귀환 2019. 7. 13. 09:00

음제 조모 케냐타 [ Mzee Jomo Kenyatta ( 1894 ~ 1978 ) ]


케냐의 민족주의자, 대통령(1964~1978)

 그는 1921년 케냐에서 최초의 아프리카인 정치 운동이 백인 정부에 저항하여 발생하자

이듬해 이에 가담했다. 공무원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케냐타는 동아프리카 연합

(EAA) 선전담당 사무관이 되어 비밀리에 활동을 계속했다.


 1925년 EAA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 해체된 후 케냐타는 키쿠유 중앙연합(KCA)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재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1928년에는 KCA의 사무총장이 되었으며 이때 공무원생활을 청산

했다. 영국의 보호령 정책을 반대했다. 1931년 영국 자유당원의 도움을 받아 하원에 출석한

그는 동아프리카 3개 식민지 연합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제5차 범아프리카 회의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1945년 맨체스터에서 개최된 이 회의의

의장은 미국의 W.E. B. 두 보이스였고, 후에 가나의 자도자가 된 K. 은크루마도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대중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 아프리카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방안과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1946년 새로이 결성된 케냐 아프리카 연맹을 이끌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1947년 연맹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52년 마우마우 반란으로 케냐타는 체포됐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60년 케냐 아프리카 민족연합(KANU)을 조직하고, 케냐타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1964년 그는 새 헌법 개정안에 따라 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정책은 1971~78년

케냐의 국민총생산을 거의 5배 정도 증가시켰고, 독립 후 20년 동안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경제 성장은 한편으로는 엄청난 부의 불균형을 가져왔다. 막대한 부의

대부분이 케냐타의 가족과 측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케냐를 블랙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가장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활기찬 국가로 만들었다.


전면 도안은 음제 조모 케냐타의 모습입니다.

후면 도안은 몸바사에 있는 터스커스 우측에 낙타와 대상들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