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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1,000볼리바르 - Simon Bolivar

은하철도의 귀환 2018. 10. 18. 09:00

시몬 볼리바르 [ Simon Bolivar ( 1783 ~ 1830 ) ]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해방자

 그는 스페인계 베네수엘라 귀족의 아들로 부유하고 지체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럽에서 공부

하는 도중 볼테르·몽테스키외·로크·홉스 같은 유럽 합리주의 사상가들의 저서에 눈을 떴다. 이후

그의 가슴속에는 라틴아메리카 독립이라는 이상이 뿌리를 내렸다.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운동은 그가 돌아온 바로 이듬해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해 스페인의

정권을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시작되었다. 1810년 베네수엘라인들은 공식적으로 스페인 총독의

권력을 빼앗고 총독을 추방했다. 임시정부가 정권을 잡았으며 볼리바르는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런던으로 파견되어 7월 런던에 도착했다. 그의 임무는 완전히 실패하고, 이미 1806년 베네수엘라

해방운동을 혼자 이끌었다가 실패해 망명중이던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를 설득해 마침내

카라카스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지도하도록 함으로써 혁명의 대의명분을 조장했다.


 1811년 헌법 초안을 만들기 위해 카라카스에서 전국 의회가 소집되었다. 오랫동안 신중한

심의를 거친 끝에 1811년 7월 의회는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는 신생 공화국 군대에

입대했고 베네수엘라의 매우 중요한 항구를 방어하도록 배치받았다. 총사령관인 미란다는

베네수엘라 전국을 스페인의 재량에 맡긴다는 휴전조약이 체결하였다. 결국 미란다는 스페인에

넘겨져 스페인의 지하감옥에서 여생을 보내다 죽었다.


 계속 투쟁하기로 결심한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를 떠날 수 있는 여권을 얻어 누에바

그라나다의 카르타헤나로 갔다. 드디어 볼리바르는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신생 공화국에 강력한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는 투사로서 이름을 얻기 시작했고 베네수엘라 해방 임무를

맡은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파죽지세의 원정을 수행하는 가운데 벌어진 6차례 격전

에서 스페인군을 무찌르고 수도를 되찾았다. 1813년 8월 6일에는 카라카스에 입성해 '해방자'

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독재권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독립전쟁은 이제 막 시작일 따름이었다.


 1814년 그는 다시 한번 스페인군에 패했다. 그해 보베스는 카라카스를 점령해 잔인무도한

폭정을 폈다. 이리하여 2번째 베네수엘라 공화국이 막을 내렸다. 볼리바르는 가까스로 미란다가

걸어간 운명을 피할 수 있었으며, 몇 차례 더 교전을 벌인 뒤 자메이카로 도망갔다. 그는 망명

도중 생애 최고의 기록인 '자메이카에서 띄우는 편지'를 남겼다. 여기에서 그는 칠레에서

아르헨티나, 멕시코에 이르는 웅장한 혁명의 파노라마를 펼쳐보였다. 그는 전체 라틴아메리카에

영국을 본보기로 해서 세습 상원과 선거로 구성되는 하원 및 종신 대통령을 두는 입헌공화국을

세울 것을 제안했다. 특히 마지막 조항인 종신 대통령제는 볼리바르가 내내 집착했던 것으로

그의 정치사상에서 가장 이중적인 면모를 띤 것이다.


 그후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를 해방시켰으나 지역감정과 기득권층의

반발로 인한 내전으로 볼리바르는 못마땅했지만 자신의 존재가 자기가 독립을 이루었던

나라들의 국내외 평화에 대한 위협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1830년 유럽으로 도피할 작정으로

보고타를 떠났다. 대서양 해안에 도착해, 후계자로 키웠던 수크레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볼리바르는 한없는 슬픔에 빠졌다. 유럽행 계획은 취소되었고 대신 볼리바르를 찬미하던

스페인인의 초대를 받아 들여 산타마르타 근처에 있는 그의 영지를 여행했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스페인 사람의 집에서 삶을 마쳤다.


전면 도안은 시몬 볼리바르의 모습입니다.

후면 도안은 카라카스에 있는 판테온(국립 위인 기념관)과 좌측에 부활절난초의 모습입니다.